대한민국의 가수. 유재하 이문세, 조용필, 이선희, 김광석 등과 더불어 1980년대 대한민국 대중음악의 상징 중 하나로 언더그라운드 음악을 발전시키고 수면 위에 올린 전설적인 인물이다.
김현식은 1980년대 한국 언더그라운드 씬을 대표했던 싱어 송라이터로서 만 32세에 요절, 추모의 반향으로 끊임없이 재조명되고 있는 인물이다. 그의 음악은 작곡/작사 능력보다는 진한 혼이 담긴 카리스마적인 창법으로 크게 빛을 발했으며,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그의 일생은 영화로 제작될 정도로 그는 드라마틱한 생을 살다간 음악인이었다.
1958년 1월 7일 서울 출생인 그는 아이스하키 선수의 꿈을 키우던 보성 중학교 시절, 1960년대 미국의 록큰롤에 심취하면서 음악에 빠져들기 시작했고, 명지 고등학교 입학 후 밴드 부에 소속되면서 음악에의 뜻을 키웠는데, 고등학교 2학년 초반 자퇴를 결심하고 검정고시 학원을 다니면서 종로의 '벌판', 명동의 '쉘브르', '썸씽' 등의 통기타 업소를 전전한 것이 음악계에 첫 발을 딛게 된 직접적인 계기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던 중 김현식은 대마초로 잠시 구속되는 방황기를 겪지만 1978년 작곡가 겸 가수이자 음반 기획자인 이장희의 주선으로 자신의 대표곡 중 하나인 <봄 여름 가을 겨울&rt;이 수록된 데뷔 앨범 녹음에 들어가는 기회를 갖는다. 하지만 음반은 소속사인 서라벌 레코드사가 대마초 직후의 이미지를 고려해 2년 뒤인 1980년에 뒤늦게 출시하게 된다. 그리고 두 번째 음반을 1984년 '태광 음반'에서 내기 전까지 김현식은 1982년 결혼을 하여 아들을 낳았고, '밤무대'에 서면서 음악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던 그가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은 <사랑했어요&rt;가 수록된 2집을 내놓으면서이다. 당시 음악다방과 다운타운을 중심으로 큰 인기를 누린 김현식은 조원익이 이끌던 '동방의 빛'에서 리드 싱어를 맡았고, 그룹 해체 후에는 정성조가 리드했던 '메신저스(Messengers)'의 싱어로 거듭나면서 다운타운 최고의 스타로 자리잡아 갔다. 그리고 이후 김현식은 유재하, 김종진, 전태관 등과 함께 자신의 밴드인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결성하여 3집 음반 녹음에 들어간다.
1985년 '동아기획'에서 발매된 김현식의 3집은 2집의 <사랑했어요&rt;에 이은 히트곡이자 대표곡 중 하나인 <비처럼 음악처럼&rt;이 수록돼 있었고, 이후 전태관과 함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결성하게 되는 김종진이 작곡/작사한 세련된 퓨전 성향의 곡 <쓸쓸한 오후&rt;도 담겨 있었다. 앨범은 마찬가지로 큰 인기를 얻었지만 김현식은 방송 출연을 자제하는 등 자신만의 이미지를 세워나가 대표적인 라이브 가수로서의 입지를 다져갔다.
하지만 순탄한 행보를 걷던 김현식은 1987년 11월 들국화의 전인권, 허성욱과 함께 마약상용혐의로 구속되고 만다. 이로 인해 자신의 음악 생활에 큰 지장을 초래하게 되고, 이 시기부터 건강을 크게 해치게 된다. 몇 개월 간 구속 기간을 마감한 후, 김현식은 사죄의 의미로 삭발을 하고 훗날 최고의 공연이라고 술회한 바 있는 1988년 2월, 63빌딩에서 재기의 무대를 갖는다. 성황리에 끝난 이날 공연 이후, 1988년 10월 김현식은 <언제나 그대 내 곁에&rt;가 수록된 4집 앨범을 발표. <언제나 그대 내 곁에&rt; 외에도 4집에는 작곡가 윤상의 이름을 알린 <여름밤의 꿈&rt;, 하모니카 연주 곡 <한국 사람&rt;도 수록돼 있었다. 이 앨범은 일간 스포츠가 시상하는 '골든 디스크'를 받는 등 상당한 판매고를 기록했다.
김현식은 공연 때마다 함께 무대에 섰던 신촌블루스의 2집(1989) 음반 작업에도 참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간다. 하지만 연이은 음반 작업과 공연 등으로 인한 쌓인 피로로 건강이 악화되어, 김현식은 한달 간의 휴식을 갖는다. 그리고 1989년 11월 김현식은 곽재용 감독의 영화 [비오는 날의 수채화]의 주제가를 권인하, 강인원, 신형원과 함께 불러 히트시키고, 1990년 3월에는 유작이 되는, <넋두리&rt;가 수록된 5집 음반을 출시한다. 전작에 비해 5집에서 김현식은 마치 마지막 혼을 내지르듯 절규했고, '술의 힘에 의해 몸이 유지되던 시기였다'는 지인들의 말처럼 몸을 돌보지 않고 비오는 날의 수채화 팀과의 전국 투어를 비롯해 신촌블루스와의 공연을 강행한 나머지 건강은 더욱 악화되어 갔다. 급기야는 입원하기에 이르렀고 간경화라는 진단을 받았다.
하지만 김현식은 병상의 몸으로 6집 음반작업을 진행시켰다. 하지만 결국 앨범은 완성되지 못한 채, 김현식은 1990년 11월 1일 자택에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후 1991년 2월 9일 김현식이 재기 공연을 가졌던 여의도 63빌딩에서 '김현식 추모 콘서트'가 행해지는 등, 언더그라운드 음악인들을 중심으로 여러 추모 공연들이 이어졌고, 1991년 1월에는 6집 앨범이 발매되었다. 지금까지도 애청되고 있는 그의 대표 곡 중 하나인 <내 사랑 내 곁에&rt;는 방송 차트 등 모든 순위 차트의 1위에 올랐고, 안재석 감독에 의해 [비처럼 음악처럼]이라는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그리고 1996년, 그가 남기고 간 데모 테이프를 송홍섭, 한상원, 배수연, 김효국, 박정운, 김장훈 등 동료 음악인들의 연주로 복원된 7집 「Self Portrait」가 나오기도 했다. 이후에도 연주곡 모음집, 라이브 앨범 등 미
발표곡 모음집과 추모 앨범들이 계속해서 발매되었다.
대한민국의 가수. 유재하 이문세, 조용필, 이선희, 김광석 등과 더불어 1980년대 대한민국 대중음악의 상징 중 하나로 언더그라운드 음악을 발전시키고 수면 위에 올린 전설적인 인물이다.
김현식은 1980년대 한국 언더그라운드 씬을 대표했던 싱어 송라이터로서 만 32세에 요절, 추모의 반향으로 끊임없이 재조명되고 있는 인물이다. 그의 음악은 작곡/작사 능력보다는 진한 혼이 담긴 카리스마적인 창법으로 크게 빛을 발했으며,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그의 일생은 영화로 제작될 정도로 그는 드라마틱한 생을 살다간 음악인이었다.
1958년 1월 7일 서울 출생인 그는 아이스하키 선수의 꿈을 키우던 보성 중학교 시절, 1960년대 미국의 록큰롤에 심취하면서 음악에 빠져들기 시작했고, 명지 고등학교 입학 후 밴드 부에 소속되면서 음악에의 뜻을 키웠는데, 고등학교 2학년 초반 자퇴를 결심하고 검정고시 학원을 다니면서 종로의 '벌판', 명동의 '쉘브르', '썸씽' 등의 통기타 업소를 전전한 것이 음악계에 첫 발을 딛게 된 직접적인 계기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던 중 김현식은 대마초로 잠시 구속되는 방황기를 겪지만 1978년 작곡가 겸 가수이자 음반 기획자인 이장희의 주선으로 자신의 대표곡 중 하나인 <봄 여름 가을 겨울&rt;이 수록된 데뷔 앨범 녹음에 들어가는 기회를 갖는다. 하지만 음반은 소속사인 서라벌 레코드사가 대마초 직후의 이미지를 고려해 2년 뒤인 1980년에 뒤늦게 출시하게 된다. 그리고 두 번째 음반을 1984년 '태광 음반'에서 내기 전까지 김현식은 1982년 결혼을 하여 아들을 낳았고, '밤무대'에 서면서 음악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던 그가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은 <사랑했어요&rt;가 수록된 2집을 내놓으면서이다. 당시 음악다방과 다운타운을 중심으로 큰 인기를 누린 김현식은 조원익이 이끌던 '동방의 빛'에서 리드 싱어를 맡았고, 그룹 해체 후에는 정성조가 리드했던 '메신저스(Messengers)'의 싱어로 거듭나면서 다운타운 최고의 스타로 자리잡아 갔다. 그리고 이후 김현식은 유재하, 김종진, 전태관 등과 함께 자신의 밴드인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결성하여 3집 음반 녹음에 들어간다.
1985년 '동아기획'에서 발매된 김현식의 3집은 2집의 <사랑했어요&rt;에 이은 히트곡이자 대표곡 중 하나인 <비처럼 음악처럼&rt;이 수록돼 있었고, 이후 전태관과 함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결성하게 되는 김종진이 작곡/작사한 세련된 퓨전 성향의 곡 <쓸쓸한 오후&rt;도 담겨 있었다. 앨범은 마찬가지로 큰 인기를 얻었지만 김현식은 방송 출연을 자제하는 등 자신만의 이미지를 세워나가 대표적인 라이브 가수로서의 입지를 다져갔다.
하지만 순탄한 행보를 걷던 김현식은 1987년 11월 들국화의 전인권, 허성욱과 함께 마약상용혐의로 구속되고 만다. 이로 인해 자신의 음악 생활에 큰 지장을 초래하게 되고, 이 시기부터 건강을 크게 해치게 된다. 몇 개월 간 구속 기간을 마감한 후, 김현식은 사죄의 의미로 삭발을 하고 훗날 최고의 공연이라고 술회한 바 있는 1988년 2월, 63빌딩에서 재기의 무대를 갖는다. 성황리에 끝난 이날 공연 이후, 1988년 10월 김현식은 <언제나 그대 내 곁에&rt;가 수록된 4집 앨범을 발표. <언제나 그대 내 곁에&rt; 외에도 4집에는 작곡가 윤상의 이름을 알린 <여름밤의 꿈&rt;, 하모니카 연주 곡 <한국 사람&rt;도 수록돼 있었다. 이 앨범은 일간 스포츠가 시상하는 '골든 디스크'를 받는 등 상당한 판매고를 기록했다.
김현식은 공연 때마다 함께 무대에 섰던 신촌블루스의 2집(1989) 음반 작업에도 참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간다. 하지만 연이은 음반 작업과 공연 등으로 인한 쌓인 피로로 건강이 악화되어, 김현식은 한달 간의 휴식을 갖는다. 그리고 1989년 11월 김현식은 곽재용 감독의 영화 [비오는 날의 수채화]의 주제가를 권인하, 강인원, 신형원과 함께 불러 히트시키고, 1990년 3월에는 유작이 되는, <넋두리&rt;가 수록된 5집 음반을 출시한다. 전작에 비해 5집에서 김현식은 마치 마지막 혼을 내지르듯 절규했고, '술의 힘에 의해 몸이 유지되던 시기였다'는 지인들의 말처럼 몸을 돌보지 않고 비오는 날의 수채화 팀과의 전국 투어를 비롯해 신촌블루스와의 공연을 강행한 나머지 건강은 더욱 악화되어 갔다. 급기야는 입원하기에 이르렀고 간경화라는 진단을 받았다.
하지만 김현식은 병상의 몸으로 6집 음반작업을 진행시켰다. 하지만 결국 앨범은 완성되지 못한 채, 김현식은 1990년 11월 1일 자택에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후 1991년 2월 9일 김현식이 재기 공연을 가졌던 여의도 63빌딩에서 '김현식 추모 콘서트'가 행해지는 등, 언더그라운드 음악인들을 중심으로 여러 추모 공연들이 이어졌고, 1991년 1월에는 6집 앨범이 발매되었다. 지금까지도 애청되고 있는 그의 대표 곡 중 하나인 <내 사랑 내 곁에&rt;는 방송 차트 등 모든 순위 차트의 1위에 올랐고, 안재석 감독에 의해 [비처럼 음악처럼]이라는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그리고 1996년, 그가 남기고 간 데모 테이프를 송홍섭, 한상원, 배수연, 김효국, 박정운, 김장훈 등 동료 음악인들의 연주로 복원된 7집 「Self Portrait」가 나오기도 했다. 이후에도 연주곡 모음집, 라이브 앨범 등 미
발표곡 모음집과 추모 앨범들이 계속해서 발매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