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후반 가요계를 평정했던 대한민국 최초의 공식 밀리언셀러를 달성한 한국 발라드의 레전드.[7] 한국 정통발라드를 확립하였으며 처음으로 발라드 가수로 불린 가수이다
경희대학교 동아리 '탈무드' 5기 멤버로서 음악을 시작했다. MBC 신인가요제 '우리의 사랑 이야기'로 1987년에 데뷔했다. 1988년에 1집《홀로 된다는 것》을 발표, '홀로 된다는 것', '너무 늦었잖아요', '새들처럼', '네게줄 수 있는 건 오직 사랑뿐' 등이 차트 상위권에 오르며 데뷔 앨범부터 큰 인기를 받았다. 이 앨범은 18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면서 대한민국 최초의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 변진섭은 1집《홀로 된다는 것》으로 골든디스크의 신인상과 대상을 동시에 받은 유일무이한 기록을 가진 유일한 가수다.# 1988년에 남자부문 신인상, 1989년에 대상을 수상하여 데뷔 엘범 하나로 신인상과 대상을 거머쥔 처음이자 마지막 가수였을 만큼 당시의 인기는 상당했다.# 이듬해 발표한 2집 《너에게로 또다시》 역시 골든디스크 대상을 수상하여 2년 연속 대상 수상이라는 기염을 토해냈다.[9] 여담으로 겉표지에는 1집이 아니라 독집이라고 써져 있다. 원래는 가수로 밥먹고 살 거란 생각을 하지 않아 생업을 목적으로 음반을 내놓지 않았고, 이 앨범만 내고 이후 평범한 일반인으로 살아가며 노래를 가끔씩 하려는 계획이었다고 한다.
이듬해인 1989년에 1집에 이어서 두 번째 밀리언셀러이자 더블 밀리언셀러를 기록한 그의 최고의 대표작 2집 《너에게로 또다시》를 냈으며[10] '너에게로 또다시', '우리의 사랑이 필요한 거죠', '희망사항', '숙녀에게'가 차트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으며 '당신의 장난감 당신의 인형', '로라' 등 앨범에 수록된 전곡이 차트 순위권을 석권했다. 특히 '희망사항'은 쇼 네트워크 16주 연속 1위, 가요톱텐 골든컵(5주 연속 1위)까지 수상하면서 이문세 이후 차세대 발라드의 황태자로 통했다. 공식 집계만 280만 장 이상의 판매 실적을 올렸다.
당시의 몸값이 최정상이었던 그는 TV 광고를 비롯한 상업적 마케팅과의 단절을 선언하며 오로지 공연에만 집중한다. 하지만 그가 밝힌 이야기에 따르면 어차피 매주 1위를 찍기 때문에 방송국 출연하러 가는 것이 귀찮았다고(?)한다. 변진섭이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자기 음악만 하기로 한 시점인 90년대 초반부터 미디어의 보급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며 전성기의 빛나는 모습에 비해 지명도가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한다. 여담으로 1990년 등장한, 변진섭 이후 발라드의 황제로 불린 동갑내기 신승훈도서태지와 아이들을 필두로 한 댄스가수들의 등장으로 인해 점차 인기에서 멀어져갔다.
대표곡은 대체로 1집과 2집, 3집에 쏠려있는 편. 1집의 '홀로 된다는 것', '네게 줄 수 있는 건 오직 사랑 뿐', '새들처럼', '너무 늦었잖아요' 가 유명하며 2집에서는 '너에게로 또 다시''숙녀에게', '희망사항', '로라', '우리의 사랑이 필요한 거죠' 등 수록 전 곡이 히트를 쳤다. 한 앨범에서 이 정도씩이나 히트곡이 나왔으니 당대 최고의 인기 가수라 불릴 만하다.[14] 이후에는 히트곡이 줄었지만 5집의 '그대 내게 다시' 와 같은 곡은 후배들에게 자주 리메이크되며 재발굴되었다.
그의 가수 생활은 야구선수로 치면 한화 이글스의 장종훈과 어떤 면에서 매우 흡사하다. 선수 초창기에 홈런왕 3연패, 연속 MVP 수상 등등 국민 타자로서의 지위를 누리다가 중반기 이후로는 비록 막강한 포스는 없지만 꾸준하고 성실하게 말년까지 활약했던 것처럼 변진섭도 2집 앨범의 밀리언셀러 가수 생활 그리고 2집에 이은 기대작, 3집 앨범의 발표 이후로는 대중적인 인기도 면에서 급격하게 하향 곡선을 그리기 시작한다.
2집의 인기가 가시기도 전인 1990년 하반기에 발표한 3집은 앨범 자체의 완성도가 훌륭했고 200여만 장의 판매고를 올리기는 했지만 워낙 괴물 같은 포스의 2집 앨범 때문에 상대적으로 심심한 평가를 받는데 그친다. 2집의 대히트로 인한 대중들의 기대는 컸기에 3집의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전작만큼의 호흥을 얻는데는 부족했다. 3집 앨범 역시 밀리언셀러 기록을 남기며 변진섭의 밀리언셀러 앨범은 총 3장이라고 할 수 있다. 후속곡으로 나온 '어떤이별'과 '미워서 미워질때'가 역시 평범한 히트를 하는데 그쳤고, 그 외에 '그대만의 모습', '꿈에 본 겨울' 같은 곡들이 알려지기는 했으나 전체적으로는 전작에 비해 뒤떨어진 느낌이라는 평을 듣는다.
그 이후로 음악적 전환을 모색하는데, 4집 앨범의 타이틀 곡은 심상원 작곡의 '너와 함께 있는 이유' 이지만 그 외 나머지 곡의 대부분을 김수철에게 받은 곡으로 채우는 파격적인 시도를 한다. 락, 블루스, 포크 등 색다른 감성의 곡으로 대중성보다는 음악적 전환점을 모색하는데 컨셉을 둔 것이다. 이러한 컨셉은 5집에서도 이어지는데 당시로서는 신인 작곡가였던 김형석의 '그대 내게 다시'를 타이틀로 발표하여 예전의 명성을 되찾는데 어느 정도 성공하는 한편, 앨범의 절반을 조규찬에게 받은 곡으로 구성한다. 감수성과 참신함이 돋보이는 음악으로 대중성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 것이다. '그대 내게 다시'는 밴드 다섯손가락의 리드보컬이었던 임형순이 1991년 상반기에 먼저 수록곡으로 발표했으나, 변진섭에게 가서 빛을 봤다.
6집의 타이틀곡 '니가 오는 날' 은 어쿠스틱 기타 하나로 구성되는 편곡과 특별히 자극적인 후렴구도 없는 잔잔한 진행이지만 역시 대중적인 호응을 얻으며 변함없는 그의 존재감을 확인한다. 다만 그 무렵의 한국 가요계는 댄스 음악, 레게, 힙합 등의 장르를 중심으로 서태지와 아이들, 김건모, 신승훈, 룰라, N.EX.T, 공일오비 같은 괴물들이 춘추전국을 이루던 시절이라 변진섭이 과거와 같은 영광을 누리기에는 이미 때가 많이 늦었다는 게 안습.
참고로 2집에 수록된, 윤상이 작곡한 '로라'는 사이토 유키의 '정열'을 표절한 곡으로 꽤 유명한 편이다.
그래도 거의 2년에 한 장씩 정규 앨범을 발표하면서 히트곡 하나씩은 만들어내는 꾸준한 활동을 계속한다. 그래도 사람들은 워낙 포스가 막강했던 1, 2집 시절만을 기억하기 때문에 특별히 변진섭의 팬이 아니라면 그가 가수 활동을 하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무릎팍도사에 나와서 '사람들이 제가 오랫동안 가수를 쉬었던 걸로 알아요' 라는 고민을 털어놓기도 했다.
그의 대표곡 중 '새들처럼' 이나 '우리의 사랑이 필요한 거죠' 는 희망을 주는 노래라 연말 불우이웃돕기 영상에 BGM으로 자주 나오는 노래이기도 하다. 마성의 BGM '희망사항' 역시 발표된 지 20여 년이 지났는데도 라디오에서 연애와 관련된 사연이 나오면 자주 나온다. 또한 당시 매니아만 알고 있던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인 노영심이 '희망사항'에서 피처링 해준 덕택에 대중에게 알려지기도 했다.
인재들을 보는 안목 또한 탁월했다. 초창기만 하더라도 거의 무명 수준이었던 작곡가들인 주영훈, 이경섭, 윤일상, 알고보니 혼수상태 등의 가능성을 일찌감치 눈여겨 보고 그들과 같이 음악 작업을 하기도.
1980년대 후반 가요계를 평정했던 대한민국 최초의 공식 밀리언셀러를 달성한 한국 발라드의 레전드.[7] 한국 정통발라드를 확립하였으며 처음으로 발라드 가수로 불린 가수이다
경희대학교 동아리 '탈무드' 5기 멤버로서 음악을 시작했다. MBC 신인가요제 '우리의 사랑 이야기'로 1987년에 데뷔했다. 1988년에 1집《홀로 된다는 것》을 발표, '홀로 된다는 것', '너무 늦었잖아요', '새들처럼', '네게줄 수 있는 건 오직 사랑뿐' 등이 차트 상위권에 오르며 데뷔 앨범부터 큰 인기를 받았다. 이 앨범은 18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면서 대한민국 최초의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 변진섭은 1집《홀로 된다는 것》으로 골든디스크의 신인상과 대상을 동시에 받은 유일무이한 기록을 가진 유일한 가수다.# 1988년에 남자부문 신인상, 1989년에 대상을 수상하여 데뷔 엘범 하나로 신인상과 대상을 거머쥔 처음이자 마지막 가수였을 만큼 당시의 인기는 상당했다.# 이듬해 발표한 2집 《너에게로 또다시》 역시 골든디스크 대상을 수상하여 2년 연속 대상 수상이라는 기염을 토해냈다.[9] 여담으로 겉표지에는 1집이 아니라 독집이라고 써져 있다. 원래는 가수로 밥먹고 살 거란 생각을 하지 않아 생업을 목적으로 음반을 내놓지 않았고, 이 앨범만 내고 이후 평범한 일반인으로 살아가며 노래를 가끔씩 하려는 계획이었다고 한다.
이듬해인 1989년에 1집에 이어서 두 번째 밀리언셀러이자 더블 밀리언셀러를 기록한 그의 최고의 대표작 2집 《너에게로 또다시》를 냈으며[10] '너에게로 또다시', '우리의 사랑이 필요한 거죠', '희망사항', '숙녀에게'가 차트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으며 '당신의 장난감 당신의 인형', '로라' 등 앨범에 수록된 전곡이 차트 순위권을 석권했다. 특히 '희망사항'은 쇼 네트워크 16주 연속 1위, 가요톱텐 골든컵(5주 연속 1위)까지 수상하면서 이문세 이후 차세대 발라드의 황태자로 통했다. 공식 집계만 280만 장 이상의 판매 실적을 올렸다.
당시의 몸값이 최정상이었던 그는 TV 광고를 비롯한 상업적 마케팅과의 단절을 선언하며 오로지 공연에만 집중한다. 하지만 그가 밝힌 이야기에 따르면 어차피 매주 1위를 찍기 때문에 방송국 출연하러 가는 것이 귀찮았다고(?)한다. 변진섭이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자기 음악만 하기로 한 시점인 90년대 초반부터 미디어의 보급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며 전성기의 빛나는 모습에 비해 지명도가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한다. 여담으로 1990년 등장한, 변진섭 이후 발라드의 황제로 불린 동갑내기 신승훈도서태지와 아이들을 필두로 한 댄스가수들의 등장으로 인해 점차 인기에서 멀어져갔다.
대표곡은 대체로 1집과 2집, 3집에 쏠려있는 편. 1집의 '홀로 된다는 것', '네게 줄 수 있는 건 오직 사랑 뿐', '새들처럼', '너무 늦었잖아요' 가 유명하며 2집에서는 '너에게로 또 다시''숙녀에게', '희망사항', '로라', '우리의 사랑이 필요한 거죠' 등 수록 전 곡이 히트를 쳤다. 한 앨범에서 이 정도씩이나 히트곡이 나왔으니 당대 최고의 인기 가수라 불릴 만하다.[14] 이후에는 히트곡이 줄었지만 5집의 '그대 내게 다시' 와 같은 곡은 후배들에게 자주 리메이크되며 재발굴되었다.
그의 가수 생활은 야구선수로 치면 한화 이글스의 장종훈과 어떤 면에서 매우 흡사하다. 선수 초창기에 홈런왕 3연패, 연속 MVP 수상 등등 국민 타자로서의 지위를 누리다가 중반기 이후로는 비록 막강한 포스는 없지만 꾸준하고 성실하게 말년까지 활약했던 것처럼 변진섭도 2집 앨범의 밀리언셀러 가수 생활 그리고 2집에 이은 기대작, 3집 앨범의 발표 이후로는 대중적인 인기도 면에서 급격하게 하향 곡선을 그리기 시작한다.
2집의 인기가 가시기도 전인 1990년 하반기에 발표한 3집은 앨범 자체의 완성도가 훌륭했고 200여만 장의 판매고를 올리기는 했지만 워낙 괴물 같은 포스의 2집 앨범 때문에 상대적으로 심심한 평가를 받는데 그친다. 2집의 대히트로 인한 대중들의 기대는 컸기에 3집의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전작만큼의 호흥을 얻는데는 부족했다. 3집 앨범 역시 밀리언셀러 기록을 남기며 변진섭의 밀리언셀러 앨범은 총 3장이라고 할 수 있다. 후속곡으로 나온 '어떤이별'과 '미워서 미워질때'가 역시 평범한 히트를 하는데 그쳤고, 그 외에 '그대만의 모습', '꿈에 본 겨울' 같은 곡들이 알려지기는 했으나 전체적으로는 전작에 비해 뒤떨어진 느낌이라는 평을 듣는다.
그 이후로 음악적 전환을 모색하는데, 4집 앨범의 타이틀 곡은 심상원 작곡의 '너와 함께 있는 이유' 이지만 그 외 나머지 곡의 대부분을 김수철에게 받은 곡으로 채우는 파격적인 시도를 한다. 락, 블루스, 포크 등 색다른 감성의 곡으로 대중성보다는 음악적 전환점을 모색하는데 컨셉을 둔 것이다. 이러한 컨셉은 5집에서도 이어지는데 당시로서는 신인 작곡가였던 김형석의 '그대 내게 다시'를 타이틀로 발표하여 예전의 명성을 되찾는데 어느 정도 성공하는 한편, 앨범의 절반을 조규찬에게 받은 곡으로 구성한다. 감수성과 참신함이 돋보이는 음악으로 대중성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 것이다. '그대 내게 다시'는 밴드 다섯손가락의 리드보컬이었던 임형순이 1991년 상반기에 먼저 수록곡으로 발표했으나, 변진섭에게 가서 빛을 봤다.
6집의 타이틀곡 '니가 오는 날' 은 어쿠스틱 기타 하나로 구성되는 편곡과 특별히 자극적인 후렴구도 없는 잔잔한 진행이지만 역시 대중적인 호응을 얻으며 변함없는 그의 존재감을 확인한다. 다만 그 무렵의 한국 가요계는 댄스 음악, 레게, 힙합 등의 장르를 중심으로 서태지와 아이들, 김건모, 신승훈, 룰라, N.EX.T, 공일오비 같은 괴물들이 춘추전국을 이루던 시절이라 변진섭이 과거와 같은 영광을 누리기에는 이미 때가 많이 늦었다는 게 안습.
참고로 2집에 수록된, 윤상이 작곡한 '로라'는 사이토 유키의 '정열'을 표절한 곡으로 꽤 유명한 편이다.
그래도 거의 2년에 한 장씩 정규 앨범을 발표하면서 히트곡 하나씩은 만들어내는 꾸준한 활동을 계속한다. 그래도 사람들은 워낙 포스가 막강했던 1, 2집 시절만을 기억하기 때문에 특별히 변진섭의 팬이 아니라면 그가 가수 활동을 하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무릎팍도사에 나와서 '사람들이 제가 오랫동안 가수를 쉬었던 걸로 알아요' 라는 고민을 털어놓기도 했다.
그의 대표곡 중 '새들처럼' 이나 '우리의 사랑이 필요한 거죠' 는 희망을 주는 노래라 연말 불우이웃돕기 영상에 BGM으로 자주 나오는 노래이기도 하다. 마성의 BGM '희망사항' 역시 발표된 지 20여 년이 지났는데도 라디오에서 연애와 관련된 사연이 나오면 자주 나온다. 또한 당시 매니아만 알고 있던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인 노영심이 '희망사항'에서 피처링 해준 덕택에 대중에게 알려지기도 했다.
인재들을 보는 안목 또한 탁월했다. 초창기만 하더라도 거의 무명 수준이었던 작곡가들인 주영훈, 이경섭, 윤일상, 알고보니 혼수상태 등의 가능성을 일찌감치 눈여겨 보고 그들과 같이 음악 작업을 하기도.